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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f0a3f21e97792c98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조선의 세종대왕님 시절에 만들어진 측우기입니다.</p>
<p>교과서에서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.<br>1441년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강우량 측정도구다</p>
<p>장영실이 만들었다고 다들 알고 있지만<br>실제로는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세자 시절에 만들었습니다</p>
<p>이 측우기가 만들어진 1441년 5월 19일을 기념하여<br>대한민국에서는 이날을 "발명의 날"로 지정하고 있습니다</p>
<p>그럼 이걸 보며 의문이 들죠<br>그래서 뭐 어쩌라고? 그냥 빗물받는 통이잖아...</p>
<p>실제 생긴 것도 간단하고 별 기능도 없죠<br>그닥 대단한 발명품? 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.</p>
<p>조선시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35a89f94dda55376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---<br>"예조에서 정부로 누런 비(黃雨)가 내렸다는 보고가 올라왔고, 정부는 이에 근거하여 국왕에게 아뢰었다."<br>-1441년(세종 23) 4월 26일<br>---</p>
<p>과거 전 근대 왕조시절에는 자연재해나 기상의 변고가 있다면<br>이는 모두 국왕의 정치에 문제가 있기에 하늘이 내린 경고라 생각했습니다<br>이때 황우가 내렸다는 보고 또한 이런 재이와 관련된 문제였고<br>신하들은 이런 재이를 물리치기 위한 대책으로 국왕의 도덕적인 수양을 요청해야 했죠<br>왕이 식사에서 반찬을 줄이거나, 죄수를 방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</p>
<p>이때 세종의 또 다른 아들 안평대군이 이런 관행에 의문을 품고<br>당시 내리는 "황우" 노란색 비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.</p>
<p>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올리게 됩니다.</p>
<p>---<br>밤사이 비가 내린 후 궁궐 물웅덩이가 노랗게 변해 사람들이 "황우(黃雨)가 내렸다"며 소동이 일어났으나,<br>조사 결과 순수한 노란색이 아니라 송화가루가 섞인 것이었습니다.<br>---</p>
<p>해당 빗물을 직접 조사하여 그 성분이 흙이 아닌 송화 가루와 유사함을 발견하고<br>그 맛을 보아 송화가 맞는지 여부, 송화를 다른 물에 타서 빗물과 비슷한 현상이 나왔는지 여부<br>해당 황우가 내린 지역에 송화가루가 평소 보다 많이 날렸는지 여부 등을 조사하여<br>황우의 정체는 송화 가루가 빗물에 스며든 단순 자연현상이란 것을 밝혔습니다</p>
<p>기상현상을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던 관행을 탈피하여<br>과학적인 사고로 기상을 관측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이죠</p>
<p>당시 안평대군이 이런 주장을 하였고 기상현상을 대하는 이런 방식은<br>이어 형인 문종이 그 비를 관측하기 위한 도구로 측우기를 발명하는데<br>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.</p>
<p>잠깐 삼천포로 빠지면</p>
<p>새종대왕은 스스로 각종 업적을 세운 명군이었지만<br>사실 자식 농사도 매우 잘 지은 왕이었습니다</p>
<p>세종의 적통 대군들은 하나 같이 매우 총명했고 뛰었났습니다</p>
<p>세자인 문종은 세종 못지 않은 천재에 군사 전문가였고<br>풍채도 뛰어나서 만약 장수했다면 세종대왕과 같은 치세를 이뤘을 인물입니다<br>실제 세종 후반기는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였음으로 대부분 문종의 업적이었죠</p>
<p>안평대군의 경우 천재로 예술과 미술에 조예가 깊어서 각종 명사들이 따랐죠<br>그의 집에 소장한 예술품이 만점이 넘었고 중국에도 없는 왕희지, 조맹부, 소식 등<br>각종 귀중한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.<br>다만 그것들 중에 하나라로 지금 남아있다면 엄청난 보물이 되었겠지만<br>계유정난 때 세조가 전부 불태워 버렸습니다.</p>
<p>금성대군과 영웅대군은 세종의 한글 창제에 깊게 관여하여<br>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보급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<br>임영대군의 경우 각종 화기와 군사 장비를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</p>
<p>조선은 원래 왕실의 종친이 정치에 관여를 할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<br>근데 세종의 아들들은 하나 같이 모두 천재였기 때문에 그 재능을 아껴서<br>세종대왕은 각종 직무과 직위를 주어 이들이 활약하게 허락했죠</p>
<p>수양대군이 정치에 관여 할 수 있었던 원인이이었고<br>그 덕분에 세종, 문종이 죽자 수양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.<br>다시 본론으로 돌아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19e7550f77deb084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74a96fd0d814d010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세자시절 문종은 당시 호조의 요청을 받아<br>다양한 실험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측우기를 완성하게 됩니다.</p>
<p>생긴 것은 매우 단순하고 별거 없는 모양이지만<br>저 모양으로 만들어 진 것에도 다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6d3c4ac8a1a25ae6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da8aed398faa4186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측우기의 원통형 구조는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<br>각종 실험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원리로 구현된 형태입니다.</p>
<p>통의 크기가 좁거나 크면 바람의 영향으로 빗물의 오차가 발생하고<br>통의 크기가 낮으면 주변 간섭으로 넘치거나 오차가 발생합니다</p>
<p>문종이 만드는 과정을 밝힌 바 다양한 그릇으로 실험을 해본 결과<br>가장 이상적인 크기인 지름 7촌 14~15cm 높이 1.5촌 (31cm)로<br>측우기의 형태를 규격화 시킨 것이죠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70606b3cdcdb6f5a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받침대인 측우대 역시 물이 튀는 것을 막는 받침대의 역할인 동시에<br>측정하는 장소마다 전부 다른 지형적 변수를 없애고자<br>화강암으로 측정지의 토대를 통일하는 규격 역할을 합니다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b7d99d28f9ac1a50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측우기가 3 등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분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<br>강우량에 따라 측정을 쉽게 하기 위해 .05촌 단위로 분해하여<br>보다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죠</p>
<p>이렇게 1441년 만들어진 측우기의 형태와 규격은<br>놀랍게도 현대에 지금도 사용하는 강우량 측정기와 동일합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cfd19b6e7e5dd801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a7c04182f713d70f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현대 전 세계 기상청에서 사용하는 강수량 측정기도<br>그 형태를 원통으로 하고 지름을 13cm~16cm로 규격화 하고 있습니다.</p>
<p>조선시대 측우기기 지름이 14cm~15cm인 것은<br>사실상 현대의 강우량 측정 도구와 오차가 없습니다.<br>모두 과학적 원리에 따른 것으로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.</p>
<p>그럼 이걸 왜 만들게 된 것일까요?<br>문종이 측우기를 생각한 것은 안평대군의 영향도 있었지만<br>조선의 관청인 호조에서 공식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2b248d71972b58c0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9092692f11dd53dc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조선은 농업국가인 동시에 중앙집권 체제 국가로<br>전국에 관리를 보내 치밀한 행정 시스템을 만들었던<br>매우 특이한 왕조국가입니다.</p>
<p>조선에서의 세금은 단순히 정해진 세율을 내는 것이 아니라<br>그 해의 기상을 조사하여 각 지역의 풍년, 흉년 자료를 토대로<br>매년 다르게 세율을 매겨서 세금을 걷었습니다.</p>
<p>교과서에서 이 내용을 배울 때에는<br>보통 어쩌라고 그냥 긍가부다~ 외우고 넘어 가지만<br>조금만 생각해 보면 세계사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<br>매우 독특한 세율 산정방식을 운용한 나라입니다</p>
<p>비슷한 농경국가 중국의 경우 이런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걷다<br>흉년이 심각하다 싶으면 조세를 감면하는 조치를 했고<br>일본의 경우는 영주들이 굶어 죽기 직전까지 수탈했기 때문에<br>애초에 이런 관념 자체를 가진바가 없습니다.</p>
<p>호조에서 매년 풍년,흉년에 따른 세율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<br>기존의 방식이 부정확하고 어렵기 때문에 요청한 것입니다</p>
<p>이전에 하던 조사 방식은 "입토심 조사" 입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cbc874c2958b6d0a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각 관아의 수령들은 매번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서<br>빗물이 땅속으로 얼마나 스며들었는지를 조사했습니다.</p>
<p>이게 지방 관아 수령의 매우 중요한 업무중에 하나였습니다.<br>이를 "우택보고" 라고 합니다.</p>
<p>각 지역의 관찰사들은 허위보고나 나태함을 경계하기 위해<br>정기적으로 각 관할 현장을 감찰하고 현장 검증을 했습니다</p>
<p>그 방식도 규정으로 정해져서 땅의 물기가 어느정도인지<br>나름의 규격을 정하여 보고체계를 갖췄죠</p>
<p>각 관아의 수령들은 이 조사를 통해 8도 지역별로<br>1리(一犁: 쟁기 하나) / 1서(一鋤: 호미 하나) 등<br>쟁기 날이 들어간 정도에 구분한 정해진 규격으로<br>비가 내린 정도를 파악하였고</p>
<p>이를 다시 9단계로 읍진(먼지가 가려진 정도의 강수량)에서<br>가장 높은 강천범란(홍수 수준의 강수량)으로 등급을 정해<br>모두 중앙 조정에 보고했습니다</p>
<p>문제는 그 방식에 오차가 너무 크고<br>자의적인 변수가 들어갈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.</p>
<p>이를 보정하기 위해 측우기가 발명이 된 것입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85139c89b146d242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이렇게 만들어진 측우기의 발명으로<br>이제 각 지방 관아는 두가지 형태의 공문을 올리게 됩니다</p>
<p>기존의 우택보고와 함께 측우기를 통해 측정 된 빗물의 양을 알게되죠<br>그럼 조선의 중앙 조정인 호조에서는 이 자료들을 토대로<br>우택보고에서 얼마였던 등급이 측정된 강우량 수치로 얼마였다는<br>자료의 교차, 비교 검토가 가능해 집니다.</p>
<p>이를 통해서 조선의 중앙 조정은 보다 과학적으로 정확해진<br>강우량과 농사에 관한 평균 통계를 산출할 수가 있게 됩니다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4ff765003450aff9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조선은 이 측우기를 각 지방관아에 제작하게 지시하여<br>전국의 도감영 14개소와 부, 군, 현 334소에 우량관측망을 구축합니다</p>
<p>이런식으로 전국적인 강수량 관측 시스템을 만든 국가는<br>역사상 존재한 바가 없고 1441년 당시 전 세계에 조선이 유일했습니다.</p>
<p>중앙집권 시스템과 전국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으면서<br>농업 국가로 기후에 관심을 가졌던 왕조였기에 가능한 시스템이죠</p>
<p>이런 조선의 기상 관측 시스템은 한동안 지속되어 유지되었지만<br>임진왜란 시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해 버립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388401fe9765de89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전국이 초토화 된 전란을 경험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<br>조선의 기상 관측은 다시 과거의 땅을 파서 측정하는<br>원시적인 방식의 입토심 조사로 돌아가게 되빈다.</p>
<p>이를 다시 측우기를 통한 과학적인 관측으로 회복한 군주가<br>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영조 임금입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155f029f1257b070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c0f4eee218c378ef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각지의 우택보고를 받아 보다 이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<br>옛 기록을 보니 세종대왕께서 이미 측우기를 만드셨는데<br>왜 활용하지 않느냐면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이를 복원하고<br>다시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지시합니다.</p>
<p>그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</p>
<p>"세종 대왕께서는 한점 바람과 한점 빗물도 소중하게 여기셨다<br>나 또한 세종 대왕의 뜻을 이제 이어 가고자 하노라"</p>
<p>아들을 가지고 양자역학 실험을 진행하여 괴팍한 성정으로 유명하지만<br>역사에서 영조를 그냥 이유없이 성군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</p>
<p>아들에게는 싸이코였지만 백성에겐 항상 자애로운 왕이었죠<br>영조, 정조 시절에 농업이 안정되고 세수가 증가했다 나오는데<br>그냥 만들어진 업적이 아니죠 이런 각종 조치들이 병행된 결과입니다</p>
<p>조선 왕조의 기상 관측은 다시 정확해 졌고<br>이런 강수량 기록은 이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되며<br>나중에 왕이 쓴 일기인 일성록에도 모두 기록이 됩니다.</p>
<p>1770년 영조가 측우기를 제작하라 지시한 이후<br>12일만에 조선의 모든 기록에서 바로 강우량 측정이 시작됩니다</p>
<p>역사학자가 전수 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대략 8천800여건 이상의<br>기상 관측 기록이 그대로 전해져서 남아 있다고 합니다.<br>일성록에도 6600건의 강우기록이 있어 교차 검증까지 가능하죠</p>
<p>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<br>무려 1770년 부터 시작한 250년 치 측정 기록을 가진 국가인 동시에<br>세계에서 가장 긴 강우량 연속 측정 기록을 가진 국가입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7c7fb384b455763c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099fed8874f6bc13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787cdd61c7d5899c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덕분에 대한민국에서 기상 자료는 스케일이 200년 이상 단위가 됩니다.<br>이를 바탕으로 각종 지수를 만들고 각종 분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</p>
<p>대한민국 기상청에서는 무려 250년간의 강우량 기록을 통계로 낸<br>서울 우량표 (1770~2019)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.<br>이런 장기간의 통계자료를 가진 국가는 지구상에 없기에 귀중한 자료죠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a56bfb1439f2abeb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한편 이런 측우기는 전국의 모든 관아에 보내졌을 정도로<br>굉장히 많이 제작이 되었음에도 전해지는 실물이 거의 없습니다.</p>
<p>1945년 광복이 되었을 때 한반도에 측우기는 모두 사라져있었죠</p>
<p>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조의 강우량 기록을 연구한 바 있고<br>일본인 학자 와다유지가 조선의 237년간의 우량표를 만든 바 있습니다.</p>
<p>그 일본인 와다 유지가 현존하는 측우기 실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었고<br>한국의 학자들이 이들을 장기간 설득하여 반환 받는데 성공합니다.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39a11125f915d55d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 style="text-align:center;margin:12px 0;"><img src="https://kookbob.com/assets/copied/20260620-2e5d93a77979dfdc.jpg" style="max-width:100%;height:auto;border-radius:6px;"></p>
<p>원래는 공주 감영에 있었던 측우기였기 때문에<br>그 이름을 "금영(공주감영) 측우기"라고 합니다</p>
<p>국보 329호로 현존하는<br>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측우기입니다.</p>
<p>끝.</p>